top of page

사에키X에노키

옥도사변_순정스커트

 

 

사에키는 문득 제복이란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개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옷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얼핏 보면 다 같아 보이지만, 아주 작은 차이가 ‘그 사람’을 만들어 낸다.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나 소매를 접었는지 아닌지 같은 사소한 차이부터, 부츠나 장갑같은 비교적 눈에 띄는 차이. 그리고 망토나 기장을 줄인 바지같이 무시하고 싶어도 눈에 띄는 큰 차이까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지만 아주 많이 다른 자신들은 모두 그렇게 사소한 차이에서부터 구별이 가능했다.

 

에노키의 바지는, 이른바 숏팬츠라고 부르는 짧은 길이의 하의였다. 아마 망토를 두르고 있지 않다면 허벅지 부분이 훤히 보일 길이지만, 그녀는 자신과 같이 언제나 망토를 두르고 다녔었다. 덕분에 얌전히만 있다면 무릎 조금 윗부분에서부터 부츠에 이르기까지의, 그러니까 이른바 절대영역이라고 부를만한 부위만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뭐, 옥졸인 만큼 그녀는 얌전히 있을 때 보다는 무엇을 위해서든 활발하게 움직일 때가 많았으니, 평소에도 언제나 허벅지의 대부분이 보이는 편이라고 해도 좋았다. 움직일 때 마다 살랑살랑. 얼핏 보이는 다리와 손끝. 사에키는 그런 것들이 참 좋았지만, 가만히 있을 때, 그러니까 무릎과 부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의 에노키의 다리가 훨씬 좋았다. 딱히 다리에 페티시가 있다거나, 단정해 보이는 쪽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망토가 나부끼지 않을 때를 좋아하는 건, 아주 단순하고 개인적인 망상 때문이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꼭 망토가 원피스처럼 보인단 말이야’

 

만약 바지가 자신들처럼 긴 바지였다면, 아니 적어도 무릎까지만 이라도 내려오는 반바지였다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 텐데. 가만히 서있을 때, 손끝과 무릎 외엔 살색이라곤 보이지 않는 망토 아래를 볼 때면 사에키는 저것이 제 것과 같은 망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마 자신뿐이겠지. 사에키는 제 우습지도 않은 망상을 남에게 말할 만큼 조심성 없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자신만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은 괜히 그 망토 속으로 손을 뻗는 것이 엄청난 금기처럼 느껴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냥 다리일 뿐이잖아?’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다른 동료들의 행동을 보면 그냥 자신만이 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괜한 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망상과 떨어질 수 없는 것 아니던가.
사에키는 제 안의 사랑스러운 말들을 모아 머릿속에서 그녀를 꾸며내곤 했다. 물론 눈앞의 에노키와 머릿속의 에노키를 착각하는 일은 없었다. 자랑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는 꽤 이성적인 남자였고, 망상과 현실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제 망상을 제 입맛대로 꾸며놓고 버려두지 않았다. 가장 눈앞의 그녀와 같게, 말이 안 되는 것은 과감하게 떼어내고 그럴싸한 것만 모아, 그 중에서도 가장 그녀에 가까운 것들만 남겨둔다. 그 과정은 마치 글을 다듬는 작가 같아, 사에키는 문득 재밌는 것을 떠올렸다.
어차피 같은 창작활동이라면, 역시 뭐라도 남기는 편이 망상보다는 이득이겠지.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난생 처음 해 보는 작곡이었다.
사이토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그의 실력은 제 스승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그럴싸하게 연주를 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연주를 하는 것과 작곡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만, 그가 괜히 옥졸 제일의 수재라고 불리겠는가. 제 스스로 책을 찾아보고, 사이토에게도 물어보며 조금씩 기초를 다져가던 그는 결국 작은 노트를 사서 거기에 무작정 곡을 써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곡을 쓴다는 것은 로맨틱하고도 솔직한 일이었다. 딱히 고백을 위한 프러포즈 송도 아닌데, 이렇게 음표 하나하나에 달콤함이 묻어져 나오는 건 모두 제가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일까.
우스운 일이었다. 망자들의 사자(使者)인 옥졸에게 사랑이라니.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는 자신들은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사라질 걱정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다른 영혼들처럼 윤회의 굴레를 따라 환생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불멸의 존재에 가깝다고 봐도 좋겠지. 뭐 그래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이 운명. 사에키는 긴 시간동안 제 몸과 영혼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마음에 대해서는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사랑의 마음은 언제까지 갈까. 지옥이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한 걸까. 그게 아니면 몇 백 년, 몇 천 년이 지나면 희미해져서 더 이상 그 웃는 얼굴과 나부끼는 망토자락을 봐도 전혀 두근거리지 않게 되는 걸까.
사에키는 그것이 무서워, 제 감정을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남기기로 했다.
언젠가 제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도, 혹은 둘 중 누가 사라지게 된다고 해도 이 마음을 기억할 수 있게. 이 곡을 칠 때 마다 그 달콤함이 제 손가락을 타고 들어와, 온 몸에 퍼지도록. 그리고 이 곡을 들은 그녀가 보여줄 반응도 너무나 궁금해서, 사에키는 처음 시작한 서투른 작곡에 너무나도 쉽게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그날도 사에키는 반쯤 완성 된 자신의 곡을 열심히 쳐보며 고칠 점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역시 머릿속으로 만든 멜로디와 직접 피아노로 쳐본 멜로디는 조금 다르구나. 박자나 음정, 이것저것을 고치며 공책을 까맣게 물들이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건반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쿵. 엉망진창인 소리가 방을 울렸지만 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이 피아노는 자신이나 사이토 외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잘 없었으니까.

 

“조금 지치네…”

 

머리를 쓰는 일이니 당연할까. 육체노동도 괴롭긴 했지만 머리를 써야 하는 일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금은 건반도 치고 있으니, 육체와 정신 둘 다 쓰고 있는 격. 손끝이 얼얼한 것은 절대 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사에키, 괜찮아?”
“아아, 응. 걱정 마”

 

엎드려서 대답한 그는 약간의 침묵 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제게 말을 건 게 누구지. 사실 마음속에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현실을 부정하듯이 굳이 그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오. 안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필 이 상황에 나타나다니.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눈 밑이 까만데요? 조금 자는 게 어때?”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에노키는 허락한 적도 없는데 제 옆에 슬쩍 앉았다. 물론 그녀를 거절한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없는 걸까. 사에키는 헛기침을 하고 도로 펜을 들었다.

 

“잠은 충분히 자고 있는걸. 에노키야 말로 이 시간에 웬일이야?”
“자러 가려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요. 문 열어놓고 치고 있었는데, 몰랐어?”

 

아아, 그랬나. 작곡에 열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보통은 시끄럽지 않게 꼭 문도 창문도 닫아놓고 연주하는데. 이렇게 까지 열중하고 있었단 말인가. 괜히 부끄러워진 그는 모른 척 하듯 공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걱정 마, 문은 내가 닫았어요!”
“고마워”
“그런데 뭐 하는 거예요? 사에키가 직접 곡을 쓰고 있는 거예요?”
“으응, 뭐”

 

물론 너를 생각하며 작곡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까.

 

“곡 좋던데, 아직 쓰는 중이에요?”
“응. 완성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할까…”
“그렇구나… 아, 가사도 붙일 거예요?”

 

가사라. 사에키는 펜을 멈추고 말았다. 확실히 노래에는 가사가 붙으면 더 전하고 싶은 것이 확실히 와 닿는 법이었지. 하지만 이 곡 만큼은 함부로 가사를 붙일 수 없었다. 제가 전하고 싶은 것을 적어버리면 그건 정말로 프러포즈 송이 되고 말테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붙이기에는 여기에 녹여둔 제 순정이 너무나도 불쌍했다.

 

“그건 아직 생각 중”
“으음…”
“…자러 안 갈 거야?”

 

다른 때라면 좀 더 있어달라고 했을 텐데, 지금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하는 자신의 앞에서 얼른 사라져 달라고, 이 곡을 듣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말뜻을 알아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녀도 졸렸던 걸까. 하품을 한 에노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자러가야죠. 사에키도 늦지 않게 자요”
“걱정 마. 곧 자러갈게”
“그럼 먼저 들어갈게? 잘 자요!”

 

눈과 입, 온 얼굴로 환하게 웃은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후우’ 긴장이 풀려 다시 한 번 건반위에 엎어질 뻔 했던 그는 눈앞에 살랑거리던 망토에 또 숨이 막혀왔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망토겠지만, 제 눈에는 무엇보다 로맨틱한 스커트. 자신만의 달콤한 망상. 이런 저런 단어가 먼지마냥 공기 중에 나풀거리자, 그의 손이 반응하듯 악보를 써내려갔다.

 

‘가사라’

 

술술 써져가는 멜로디를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가사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 지금 이 단어들을 모아 가사를 만들어 볼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녀에게 들려주는 그 순간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무겁고 비장한 일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감정과 단어들을 까만 점과 막대들로 만들어가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 * *

 


그 세계에서 자신과 에노키는 옥졸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 남녀로 만난 자신과 그녀는, 같은 학교를 나와 언제나 같이 붙어 다녔으며, 지금처럼 사이도 좋았다. 마치 꿈만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에키는 조급해 져서 그녀에게 악보를 내밀며 고백을 했다. 좋아해 에노키, 너를 생각하며 쓴 곡이야. 곡을 듣고 악보를 받은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입술 모양에서 그쳤을 뿐,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닿지 않았다.

 

놀라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후였다. 아아, 역시 꿈이었구나. 사에키는 당연한 사실에 웃으면서도 괴로워졌다. 어째서 자신들은 이런 인연으로 만나 쉽게 사랑할 수 없는 걸까. 몇 달을 거쳐 거의 다 완성되어가는 악보를 쥐고 한바탕 눈물 없는 울음을 쏟아낸 사에키는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다시 피아노 앞에 앉고 말았다.
얼른 완성해 버리자. 또 그런 꿈을 꾸기 전에, 제 마음을 형태로 남기자.
조급해진 마음은 그의 영감을 자극했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앉은 그 자리에서 곡의 마무리를 다 지은 사에키는 심호흡을 하고 완성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보기 시작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가장 흡사하게 형태로 남은 연주. 어떤 부분은 제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고, 어떤 부분은 제 생각보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 또한 사랑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제가 쓴 곡답게 틀리는 부분도 없이 연주를 끝낸 그는 마지막 음을 치고 나서도 쉽게 건반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짝짝짝. 문 쪽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지친 눈으로 악보를 바라보던 사에키는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문에 기대어 서있는 것은 그녀였다.

 

“드디어 완성했네요, 그 곡!”
“아아, 응. 어때?”
“최고야!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의 칭찬은 의례적인 것이 아니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기운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은 이 곡이 좋다고. 이 곡을 마음으로 느꼈다고.
어쩐지 뿌듯해진 사에키는 악보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노키”
“응?”
“이 곡 말이야, 아직 가사는 없어”

 

아마 자신은 영원히 이 곡에 가사를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것을. 제 마음을, 자신의 사랑을, 심장을,

 

“에노키가 써보지 않을래? 가사”

 

그녀에게 넘겨 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것이 사에키의 결정이었다.
에노키는 눈앞에 내밀어진 노트에 당황한 듯 눈만 깜빡거렸다. 제가 정말로 이걸 받아도 좋은 걸까. 적잖이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사에키는 말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정말요? 내가 써도 되는 거야?”
“응. 나는 에노키가 써 줬으면 좋겠어”

 

비겁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 마음에 에노키가 어떤 가사를 붙이든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가사야 말로, 에노키가 제 마음에 말하는 대답일 테니까. 잠깐 고민하던 에노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를 받았다.

 

“나, 힘낼게요! 대신 필요할 때 마다 연주해 줘야 해요? 난 머리가 나빠서 멜로디를 까먹을지도 모르니까!”
“그거라면 걱정 마, 몇 번이든 연주 해 줄게”
“헤헤, 그럼 됐어요!”

 

그렇게 좋을까. 사에키는 에노키를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럼 밥 먹으러 가요,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한데 키리카 씨 출근했을 테니까!”
“응. 그럴까?”

 

사실 별로 배고프진 않았지만 아침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릴 리가 없었다. 그녀를 따라 방을 나온 사에키는 부엌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아침 찬바람에 휘날리는 망토 자락이 제 앞까지 펄럭이는 것에 마른 침을 삼켰다.
오직 제게만 스커트인 이 망토. 제 순정의 상징. 자신 외에겐 의미가 없고, 오직 자신만 건들 수 있는.
아니, 자신조차도 건들 수 없는.
그녀만의. 제 머릿속 그녀만의 스커트.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그 옷감을 낚아 챌 수 있는데도, 사에키는 그저 쓴 웃음만을 지을 뿐 절대 손을 내밀지 않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