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쉬X니아
페이트 제로,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_Morning Haze
“홀가분해진 얼굴이로구나. 무언가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오탁을 쏟아내던 성배는, 이제 흔적도 남지 않은 채 저 멀리로 흩날려 갔다. 아스라하고 불쾌했던 감촉을 되새기며 니아는 어느새인가 제 코 앞에 다가선 사내를 향해 웃어보였다. 말로써 대답하지 않았으나 평소라면 그것을 불경이라 꾸짖었을 사내는 다만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 상냥함에 직감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처연하게도. 허나 마지막까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억지로 당겨올린 입꼬리가 흔들리지 않길 바랐다. 그의 기억 속에선 언제나 불요불굴의 마스터로 남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아집을 부린다. 사내는 싱겁다는 듯 그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다 말한다. “그래. 그 범부의 머리로도 이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깨닫는 것 하나 쯤은 있어야겠지.” “아하……하.” “그리 주눅든 얼굴 말거라. 네 놈,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에 걸맞게 의기양양한 얼굴이라도 하고 있거라.” 사내의 마지막 말이 끝나는 순간 안온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소녀는 눈을 감고 짧았다면 짧고 길었다면 하염없이 길었던 싸움의 나날을 돌이켜 보았다. 그는 소녀를 최후의 승자라 지칭했다. 그것은 실로 옳은 말이었다. 종국에는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성배 전쟁의 승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녀에게만이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비록 그 호칭을 위한 모든 것을 이루어준 것은 사내일지라도. “짐의 마스터를 지칭한다면 응당히 해내었어야만 할 일이었으나, 근본 자체가 미숙함으로 들어찬 너에겐 버거운 책무였겠지. 허나 훌륭했도다.” “…….” 아주 잠시,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기라도 한 걸까.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의 말에 당혹스런 얼굴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곧 그 맹한 표정을 보곤 비식 웃으며 부언해왔다. 왕으로부터의 치하에 감복해 눈물이라도 흘리는 게 어떻겠느냐, 고. 그 말엔 결국 소녀도 평소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이니만큼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바랐던 것은 사실이나 아무래도 저와는 다르게 이 임금님에게 있어 이별이나 종막은 너무나도 평이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천 년도 이전의 사람이었다. 살아 생전에도 소녀의 곱절을 살았으며, 수많은 이를 떠나보냈을 것이고, 또 그 자신도 한 번은 죽었을 사람이니만큼 상실으로 인한 쓰라림 같은 것은 이제 희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엔 왕님께 칭찬도 받네요.” 기뻐요. 정말로. 괜한 헛기침으로 가다듬은 목소리로 내뱉은 것은 더없는 진심이었다.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어 상처 입는 것도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리던 다리를 이끌고 사지로 향하는 것도 불사했다. 미련하고 아둔한 궤적이었으나 그것은 소녀가 진심을 내보일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마주 웃는 드물게 유한 정적. 그가 그랬듯이 무언가 농이라도 건네볼까 그를 올려다 보는 순간, 금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며 같은 빛의 잔재를 떨구었다. 그것은 시한부를 알려오는 신호였다. 어금니를 악물며 웃었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니라 무언가 소중한 것을 속삭여야 하는 순간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이젠 평생토록 물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꼬옥 쥔 두 손이 아플 만큼 힘을 주던 소녀는 이내 결의와 함께 입을 열었다. “……왕님. 마지막이니, 감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호오. 허락하마. 말해보거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줄곧 지금 이 시대엔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셨으면서, 어째서……오염된 성배를 파괴해주신 건가요?” 그렇게 건넨 말 너머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함께 들려온 것이 있다. 이를테면 왜, 이 세계를 당신의 손으로 구해주셨나요, 라고 묻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 같은 것. 황금빛 갑주 위를 간헐적으로 두들기던 손가락이 멎는다. 허공에 놓인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히 대답해왔다. “기껏 발을 디뎠던 세계의 무료함에 지친 왕의 변덕이라고 생각하거라.” “길가메쉬.” “…….” “진심을 말해주세요.”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애써 웃는 얼굴을 꾸며내는 것도 퍽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끝끝내 지켜낸 미소로, 소녀는 말한다. 마지막이잖아요. 수 분도 남지 않았어요. 언제부터인가 올곧게 영웅왕과 마주하기 시작한 갈색빛 눈동자가 상냥한 기색을 띠고 있다. 사내를 바라봐야 할 때마다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이제는 단지 굳건한 믿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얄팍하거나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가끔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어 사내마저 아연하게 만들었고, 또한……. 사내는 고개를 젓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교활한 수로 이레귤러를 불러낸 무리가 있었다. 진명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벤저, 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무리를 제외한 모든 서번트를 거꾸러뜨려, 두 사람이 마지막 싸움만을 남겨두었을 무렵이었다. 편법과 졸렬한 수단으로도 최강의 영령에게는 이길 수 없다 체념이라도 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성배를 넘겨줄 수 없단 아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은 령주를 사용해 제 서번트를 자결시켰다. 예사로운 이야기지만 당연하게도 치천의 좌에서 최후의 승자를 맞이하고자 기다리던 성배는 오염되어, 직후 오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원초의 악성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가 먼 옛날 극동의 땅을 집어삼킬 뻔 했다던 참사의 재림이 거듭될 것이라 생각했던 때였다. 성배를 거머쥐는 것까지 단 한 걸음을 앞두었던 소녀마저도, 그리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녀를 제 등 뒤로 물리며 그가 검을 쥐었다. 소녀가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던 재보. 하나 남은 령주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써버린 걸까, 소녀는 그저 아연한 얼굴로 손등을 내려다 보았지만 거기엔 여전히 선명한 한 획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그의 의지였던 걸까. 어쩐지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가 느린 보폭으로 이 상황을 따라잡다 결국엔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모든 것을 멈추어버렸을 때, 그의 보구가 모든 시야를 점령했다. 어째서 천지를 가르는 개벽의 별이라고 불리우는가. 언제인가 품었던 의문이 덧없이 바스라져 갔다. 폭풍과도 같은 위력에 휘청대던 소녀를 잡아세운 손. 갑주 너머로 전해져 왔던 온기. 일격에 산화되어간 오탁. 그리고 지금, 소녀를 내려다 보는 안온한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그것에 대답할 의리는 없다, 고 속삭이려 했다. 소녀의 말대로 머지 않아 이대로 헤어져 끝날 관계에 구태여 베풀어줄 온정 같은 것은 애초에 그에게 존재하질 않았기에. 헌데 그러지 못했다. 별 것 아닌 배려에도 환히 웃던, 조각난 기억 속의 소녀에게 이제 와 마음이 쓰이기라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깊이 파고들수록 설은 감정에 당혹스러워 하게 되는 것은 남자 스스로일 테니 그 해답을 내리누를 뿐. 그는 내리뜬 눈으로 차분히 읊는다. “가치는 없었다. 하다 못해 인간 개개인 중 눈길을 끄는 녀석도 없었지.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 “오랜 시간 잠에 들었던 짐을 깨운 것도 모자라 이 시대에 불러내기까지 한 계집은 그 중에서도 가장 한심했다. 처음, 위광에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구나. 허나 그 반 푼어치의 성정으로도 제 스스로를 믿는 것엔 한 점 흔들림도 없었지.” 그 순간 돌연 그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래. 돌이켜보면 그 올곧은 신뢰를 토대로, 제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짐의 재보를 쓰라 령주를 두 번이나 낭비했던 것은 퍽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 같기도 하구나.” 소녀는 문득 단 한 획의 령주만이 남은 왼손을 어루만졌다. 사내는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다 다시 말을 잇는다. 이따금씩 신랄히 내뱉던 비아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 이후, 아주 조금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유예를 주었지. 그간 네가 믿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을 최후까지 관철해 나갈 수 있는가를 지켜보려 했다. 그렇게 한 발 물러선 곳에서 바라본 네 놈은 정말이지 우스운 잡종이었다. 불확실과 부조리에 온 몸을 부딪치는 그 미련스러움과 아둔함엔 이 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 하지만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발걸음만은 멈추지 않는, 참으로……볼 만한 발자취였다.” 그래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산산조각나 주변을 온통 제 옅은 순정빛으로 물들여 버릴 것만 같아 소녀는 제 손등을 무던히도 꼬집고, 할퀴어 괴롭혀야만 했다. 허나 종국에는 무용한 일이었다. “하여, 네 놈에게 살아갈 세계를 주고자 했다.” 그 대답마저, 눈이 부셔서. 그 말은 축복이었을까. 소녀는 한층 짙어진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유일한 존재를 우러러 보았다. 그는 태양에도, 바람에도, 폭풍에도 지지 않는다. 사 천 년을 넘어선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그곳에 선 채 인간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불변한 책무를 어깨 위에서 내려두지도 않고 다만 꿋꿋하게 지금까지도 다하고 있다. 그런 이에게서 받은 다시는 없을 긍정이었다. 이를 축복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녀는 그것이 저주였더라고 한들 기꺼이 감내했을 것이다. 흔들리는 금색 앞머리칼 아래로, 붉은 시선이 소녀를 본다. “답이 되었느냐.” “……네.” “그렇다면 이것으로 작별이구나.” 소녀는 어느샌가 자신이 울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 미지근한 것은 눈물임에 틀림없었으니. 그녀는 뒤늦게 불투명한 시야에서 눈물을 걷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등 너머로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고 보다 가까이 다가와 다정한 이별의 말 한 마디도 건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왕에게 어울리는 떠나감은 없다.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토로하는 대신 꾹 삼켜낼 정도의 침착함은 아직 잃지 않았다. 전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걸어온 이상 소녀는 이제 어린 아이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각오한 눈매가 사내를 보며 다시금 굽어진다. 어여삐 보인다면 좋을텐데, 소녀는 사사로운 소망을 빌어보았다. 니아. 이윽고 왕이 부른다. 네. 이윽고 소녀가 대답한다. “살아가거라.” 성배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금빛 잔재가 도시 곳곳에 내려앉았다. 마력 고갈로 인한 극심한 현기증에 시달리면서도 니아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쩐지 평생토록 시야 한 곳에서 사라지지 않을 듯 선명한 광경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허기를 느껴 끼니를 챙기면서도, 책을 읽다가도 불현듯 떠올라 말문을 틀어막히게 될 것만 같은 광경이기도 했다. 그토록 깊은 잔상, 아니 어쩌면 흉터를 남긴 것이었다.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머무름으로. 사실은 더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어요. 그렇게 뒤늦게서야 치미는 버거운 감정이, 아주 많았다. 사내를 닮아 찬란한 잔재에도 왈칵 눈물이 흐를 만큼. “…….” 만연한 금빛에 눈이 시려 소녀가 아주 잠깐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 사이 새파란 어둠으로 물들었던 하늘 저편에서는 주홍빛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득한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아침 안개 너머로, 여명의 빛이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