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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미네 다이키X니시나 히나코

쿠로코의 농구_남은 여름에 꽃다발을

 

 

 당신의 계절은 여름이다. 어쩔 수 없는 여름, 정확히는 그 끝자락. 장마처럼 내리는 햇빛도 햇빛처럼 내리는 장마도 그 열기도 습기도 모두 크게 호흡하는 것처럼 순서와 박자에 맞춰 이어지다 큰 숨이 한 번 지나간 후, 그 끝, 여름을 모두 통과해 나간 그 지점에 당신이 있다. 새벽의 아지랑이 속에 온통 온실로 들어온 것 같다. 눈을 감고 숨을 뱉자 시야가 온통 제 숨으로 메워진 것만 같은 하양, 어떤 시선도 흐려진다. 발걸음이 닿는 모든 공간마다 한여름의 습기를 가득 머금은 아스팔트가 밟히며 연한 고무 향을 낸다. 문득, 뒤를 돌면은 당신이 보이겠다, 그런 예감이 든다. 오른쪽 다리를 주축으로 빙글,하고 중심을 바꾸자 허공에, 가시적 물방울들, 그리고 당신. 그 짧은 꿈을 꿈 지 한참, 아직도 당신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내 고등학생 즈음의 기억 속의 당신, 언제나 이질적인 시간대의 익숙한 길가 앞에 당신이 있었다. 분명 등굣길이었겠지, 하는 생각에 고등학생으로서의 시간들이 회상된다. 그 시절은 어떤 계절이어도 여름 같았다. 들이마시는 숨마다 열기를 띄었고 어디를 바라보나 눈이 부셨다. 그 하루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너였고 그것으로 내 시선은 항상 물기 어려 무어든 물에 빠진 것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살아있음이 가장 실감되던 시간은 단연 그 순간들이었다. 노트 구석에 서로의 이름이 가득하던 그 시절, 순간들. 혐오하는 것들보다 자주 머릿속을 아득히 메우던 그 속의 당신. 오래된 것은 어떻든, 어떻게든 그 형태를 달리한다. 여러 시들이 품었고 품다 시든 구절이다. 하루를 꼬박 컴퓨터를 붙잡고 글자들에 매달리다 문득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구절이 상기됐다. 그리고 기억들과 여러 시들도, 새벽 밤 파도 속에 내던져 지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이 어지럽게 큰 소리로 울린다. 액정에는 부재중 전화 두 통과 지금의 수신인이 하얀 글씨로 빛난다. 응, 다이키. 어, 바빠? 이제 아니. 오늘은 언제 와. 다이키가 한참은 더 나 보고 싶어 하고 나서. 작게 웃는 소리가 수화기를 너머로 들리자, 이따 와인 사갈게, 하고 덧붙인 뒤 핸드폰을 내려둔다. 슬 걷힌 커튼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아리다. 아직은 여름이구나, 싶은 기세. 모니터에 가득한 글자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이내 자리를 정리한다. 거리는 계절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한다. 옷들도 꽃들도 여전한 것 없이 누군가의 사치품처럼 빠르게 교체된다. 심지어는 온도부터 소리까지 찬찬히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태와 다른 공기가 주위를 감싼다. 열려 진 창문에서부터 후욱,하고 바람이 비져흐른다. 연한 커피 향기와 바람이 드는 곳에 걸린 옷가지들의 섬유유연제 향기, 그리고 당신의 향기가 그 속에 숨어있다. 어, 왔어? 당신은 자연스레 내 손에 들린 천 가방을 받아들고 고개 숙여 입을 맞춘다. 나근한 온도. 오늘은 틈이 없었나 보다, 하는 당신의 말에 그저 푸스스 웃는다. 와인은? 가방에 있어, 같은 일상적인 대화와 몸짓이 이어지다 곧 테라스에 들어선다. 가림막 없이 환하도록 눈앞에 도심의 불빛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은하수 위에 발을 디뎌 걷는 것만 같다. 난간을 넘어 그 위로 발을 디디면 별사탕처럼 작게 바스러질 것만 같다. 앞 테이블에 잔을 두고 두세 사람은 넉넉히 앉을 만하도록 긴 의자에 앉는다. 당신이 곧 따라 앉고 팔을 내 어깨 위로 두른다. 불빛이 느른하게 흐른다. 당신은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잔잔한 어조와 온도로 구성된 대화. 말소리만큼 중간중간 온근한 침묵이 서린다. 그것이 길어질 때 즈음 묵묵히 당신을, 그 분명한 색채를 바라보다 문득 입을 뗀다. 다이키, 고등학생 때 애들이 자주 했던 말 기억나? 오래되면 뭐든 변한다고. 어엉, 이삼 학년 때부터는 귀에 박히게 들었지. 그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들었던 것 같아. 꼭 저주 같다고도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또 맞는 말 같더라. 그때는 가만 보고만 있어도 표정 감추느라 힘들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레 이렇게 있고. 그래서, 지금이 싫어?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볼에 입을 맞췄다. 부스스 웃으며, 다이키, 나는 널 사랑할 수밖에 없어, 속삭이듯 말하고 이번에는 입술에 가볍게. 기간을 생각해본다. 10년은 대략 인생의 팔 분의 일 정도지만 그것이 어느 부분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무게는 차이를 가진다. 어쩌면 우리가 갖은 10년은 가장 유동적인 시기를 삼키고 있었을지 모른다. 서로를 구성한 그 기간은 자연스레 구석구석 뻗쳐갔겠지. 가령, 당신은 나를 닮아 글을 근처에 두고 종종 커피를 마셔가고 나는 당신을 닮아 한참 농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고 아린 탄산을 직접 찾게 되는 일들. 그런 식으로 시간은 경계를 무디게 만들어갔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당신에게 얼룩을 만들 수도 당신이 내게 병을 건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따라 덮쳐든다. 혹은 어떤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익숙해져 갈지 모른다.
 어느 순간은 당신에게서 내가 알던 부분이 완연히 말소될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나일 수 있을까. 그런 상념을 가진 채 당신을 본다. 그리도 곰곰이 생각하는 데도 순간, 당신이 참 예쁘다. 내 눈에 들어온 모든 것 중에 가장 아름답다. 활자를 꺾어대 글을 쓰며 아름다운 것을 찾아 사경을 헤맸지만 결국 이보다 예쁜 것을 찾지 못했다. 한참 당신을 바라보다, 이것으로 되었나, 당연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손에 들린 잔을 내려두고 당신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벚나무 밑에서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열일곱 여자애 마냥 볼을 빨갛게 익히며 말한다. 다이키, 나는 계속 변했으면 좋겠어. 무서워하지 말고. 이렇게 쭉 변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서도 나는 널 사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당신은 작게 웃고서 내 어깨에 얹은 손으로 느리게 토닥였다. 뭐, 변하는 부분이 많아도 설마 그러겠냐. 그렇겠지, 그러면 환생하고서가 더 현실적일까. 이어진 웃음소리가 잠시 그치고 주변의 소음들이 공간을 메운다. 아득히 들리는 매미 소리와 풀들이 쓸리는 소리, 우리 것이 아닌 작은 말소리들이 이리저리 섞인다. 숨소리가 사근하게 울린다. 고요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당신이 보다 작은 소리로 나는, 하고 말한다. 나는 다음 생에도 너를 만나야 해. 그때는 내가 너를 먼저 찾아내고 좋아할게, 숨을 길게 뱉으며 바람 소리가 스미도록 당신이 말했다. 홀로 다짐하는 듯한 어투였다. 다음 생에 대하여 생각한다. 아득한 시간 뒤의 생에는 어디서 태어날까, 그때도 당신은 농구를 하고 나는 글을 붙들까, 어느 것 하나 불확실하다.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그 불확실성에 투신한다. 어디에 추락할지, 어느 곳이 먼저 으스러질지, 얼마나 출혈할지 그 모든 것의 불안함은 당신이 한 번 웃는 것으로 괜찮은 일이 된다. 짧은 생애 속에서 지껄이는 영원과 환생은 오롯 비유로밖에 사용될 수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모든 진심을 담아두고, 다음 생에도 너를 만나겠다, 그렇게 약속한다. 어느 신에게도 빌지 않고 약조받지 않은 채 이번 생은 그저 노랫말로서, 꽃다발 하나를 놓아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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