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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로저스X송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_siGrE

 

 

1.

 

"눈 앞의 장미를 아낄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 눈 앞의 여자가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무심함과 다정함 그 중간 단계에서 맴도는 맑은 시선에 그는 차마 무어라 더 말할 생각도 못하고 그녀가 잡고 있는 제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저도 모르게 우악스러울 정도로 장미 줄기를 잡아 뜯은 손바닥 위로 퐁퐁 핏방울이 솟고 있었다. 시선 끝으로 그의 것보다 두 배는 가는 손가락이 상처 주변을 맴도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만히 혀 끝을 물었다가, 마치 쓴 물을 와그르르 뱉어내듯 중얼거렸다.

 

"주저하다간, 꺾고 싶어도 꺾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변명하듯 웅얼거리며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던 꽃잎을 들어 보였다. 마디가 튀어나온 긴 손가락 사이사이로 붉은 꽃잎이 새는 것은 꼭 핏덩어리가 새는 것 같았다. 제 손바닥 위를 맴돌던 그 작은 손을, 그저 한 번 손을 뒤집는 것으로 잡아챈 그가 그 꽃잎들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쏟아 부었다. 뺨 위를 스쳐 지나간 예의 그 시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잔잔한 수면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흔들거리는 시선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바싹 마른 입술 위로 혀 끝을 미끄러트렸다.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네요."

 

-그러게요. 그녀는 똑같은 말을 조금 바꾸어 말하며 빙긋 웃었다. 꼭 빗방울 떨어지듯 맑은 목소리였다. 마른 어깨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화들짝 놀라 -윤,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울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도리질했다. 그러나 떨리는 어깨만큼은 어떻게 하지 못한 그녀가, 결국은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왜 우는 걸까? 내 그 행동이 당신을 이토록 울게 만들 이유가 있었나? 그는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온 의문들을 쓴물과 함께 삼켜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품 안에 안긴 작은 몸은 꼭 어린 새처럼 팔딱거리는 심장 소리를 냈다. -나는 당신에게 슬픔밖에 될 수 없는 존재인가요? 부어 오른 혀 끝으로 내뱉지 못한 질문이 뭉그러졌다. 

 

2.

 

"미안해."

 

윤은 멀거니 고개를 들어 제 앞에서 깊숙하게 허리를 숙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되어 먹지도 않은 검은 정장에 남색 타이 차림이었다. 꼭 무슨 초상이라도 난 듯이. 눈 밑으로 그림자가 깊숙하게 박힌 얼굴이 휘장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눌린 살갗에서 축축함이 느껴졌다. 내가 울었나? 그녀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울었나? 여기서, 이 자리에서? 눈 밑이 시큰거리면서 아파왔다. 기울이듯 숙인 목덜미로 장난기가 쑥 빠져 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지켰어야 했어, 내가 당신에게 약속했잖아───"
"스타크, 제발."

 

목 밖으로 샌 목소리가 형편없이 찢어졌다. 그녀는 토니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알고 있었다. 앤서니 스타크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헬리캐리어를 타고 떠나기 전 토니는 그녀에게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알아, 결혼식 직전에 데려가서 미안해, 그래도 캡시클만은 멀쩡하게 모셔올 테니까. 그 때 그녀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나왔던가? 그녀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다 무심하게 생각했다. 아, 그래, 결혼식. 우리는 결혼식을 하려고 했지. 동료들 몇몇을 증인으로 세우고 토니를 사회로 세워서. 이제 그것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한국의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뭐라고 말하고 그의 곁에 남는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약속한 남자가 죽다 살아나서 이제 기억조차 남지 않았다는데, 그녀는 진척되었던 약혼과 앞두고 있던 결혼식의 빈 자리를 어떻게 메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구역질 나는 계집애, 이기적인 년..... -윤, 하고 토니가 위로하듯 다시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그녀보다도 상냥하고 진실되어서, 그녀는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스타크, 제발 부탁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혀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제발."
"윤, 나는......"
"제발, 스타크, 이제 제발 그만해줘요."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요. 그녀는 화풀이라도 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곧장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다. 누가 누구의 가슴을 헤집는단 말인가? 연인을 잃은 여자는 친우를 잃은 사내의 가슴을 헤집어도 된다는 법이라도 있던가? 상처의 경중과 무게는 누가 따질 수 있는가?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술을 물고는 -미안해요, 하고 속삭였다. 눈 앞에 있을 토니가 -아니야, 하고 마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환자실의 두꺼운 유리 너머로도 삐, 삐, 하는 전자음이 선명했다. 그녀는 느릿하게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바닥을 응시했다. 토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중환자실 너머의 스티브 로저스 마냥 딱딱하고 찬 얼굴로 굳어있을까? 병원의 흰 천장도 딱딱한 바닥도 온 세상도 모조리 낯설었다. 꼭 세상에서 오려져서 내던져진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반질반질한 구두코가 보였다. 코 끝으로 소독약의 알싸한 물빛 향기가 휘돌았다.

 

"....기억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이름도 가족도 모조리 잊어버린 걸로 판명됐어. 해마에 문제가 있는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PTSD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어벤져스고 하울링 코만도스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영어를 기억하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그러더군."
"......버키 반즈도?"
"자기 어머니 이름도 기억 못한다니까. 그리고 그 쪽과 관련된 이름을 들으면 발작을 해서."

 

토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언제나 쾌활한 척, 자신 있는 척 구는 것에 익숙했지 이토록 연약하게 구는 것은 낯 설 터였다. 그녀는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앞 서 보았던 스티브의 모든 발작과 행동들을 되짚어보았다.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캡틴, 이라는 호칭에는 발작을 했지.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이제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터다. 그가 그녀와 함께 돌아가기는 하겠는가? 토니가 그것을 허락할 것인가? 의사는? 퓨리는? 그는 미국의 영웅이었다. 그녀가 그와 사랑을 했건 하지 않았던 간에 그는 한 순간에는 유리세공보다도 더 귀하게 모셔져야 할 몸이었다. 시야가 수채화 물감 흐리듯 부옇게 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발악과 눈물과 고통을 넘어 한 순간이나마 손을 잡고 미래를 꿈꾸지 않았던가? 사랑을 속삭이고 미래의 아이들을 그렸지 않았나?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가를 손바닥 끝으로 꾹 눌렀다. 순간 순간이 꼭 죽음 같았다. 

 

"괴로우면 병원에서 지내게 해도 돼."

 

반 평생을 '캡틴 아메리카'를 찾아 헤매던 아버지에게서 외면당하고 남은 평생을 그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꼭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현자의 목소리처럼 엄숙했다. -감히 누가 당신을 비난할 수 있겠어? 하는 말에는 그림자 속에 잔뜩 묻혀놓은 상냥함이 떨어져 그녀는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토니는, 멍청하고도 우직한 토니 스타크는, 그녀에게 도망갈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녹갈색 눈동자 너머로 너울거리는 상냥함과 단단한 의지가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녀는 눈물 자욱이 잔뜩 얼룩진 얼굴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이 형광등 빛을 반사해 눈 앞에 부스러진 빛 무리가 무지개 색을 띠었다. 

 

"둘 다 상처 입을 필요는 없어."
"스타크."
"당신이 데려간다고 해서 좋아질 거라고 말하는 건, 그야말로 판타지니까."

 

-우린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온정 어린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질근질근 씹어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약혼녀가 사랑으로 돌봐 기억을 되찾은 영웅의 이야기는 그녀와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위장 끝부터 목구멍 바로 앞까지 쓴 물이 치밀어 올라 그녀는 애 먼 무릎을 쥐어 뜯었다. 

 

".....토니."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뾰족하게 세운 혀 끝으로 훑었다. 꺼끌하게 일어선 입술에 혀 끝이 따끔거렸다. -토니. 한숨과 울음의 중간에서 애매하게 머무른 소리를 듣고 토니는 조용히 한 쪽 무릎을 꿇고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꼭 어린 계집애가 되어 아버지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꼭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네 선택을 믿는다고, 그런 상투적이고 희망찬 대사라도 나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었고 그녀는 상냥하고 말갛기만 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티브가 그녀를 기억할 거란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페기 카터와 제임스 반즈를 잊었는데 그가 송윤을 기억하겠는가? 그저 그의 인생에 먼지바람과 같을 계집애를? 

 

아, 하지만.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속눈썹 끝에 놓인 눈물방울이 똑똑 바지 위로 물 자국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스티브, 나는. 그녀는 그 언젠가 그에게 했었던 약속을 되씹어 현실 위로 불러들였다. -만약에 당신이 모든 걸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천진하고 굳은 약속이었던가? 그녀는 그 약속을 되짚어 부수고 싶지 않았다. 그조차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가? 반드시 돌아오겠다던 그 먼 옛날의 약속을. 스티브, 내 사랑, 내 브루클린 달링. 입 안으로 달큼한 애칭들이 먼지 구덩이 마냥 굴러다녔다. 내가 한 약속을 당신은 기억이나 할까요? 아니야, 당신은 잊어버리겠지. 아마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야. 나는 아마 당신과의 약속을 홀로 지켜내게 될 테고. 힘겹게, 슬프게, 비참하게. 하지만 스티브, 그래도 괜찮아. 당신이 여기까지 돌아와줬으니까, 이제 내가 내 약속을 지킬 차례니까, 그러니까..... 

 

"윤."

 

토니의 목소리는 상냥했고, 담뱃진의 냄새를 가득 담은 쓴 맛이 났다. 애칭처럼 장난스레 부르던 코드네임 대신 진중하게 떨어지는 본명이 낯설었다. -윤, 로저스 부인. 그가 그렇게 속삭이면서 제 손으로 덮은 손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그 다정하고 염려 어린 행동에 눈을 깜빡이며 쓰게 웃었다.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똑, 똑, 힘줄이 잔뜩 불거진 기계공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괜찮을 거에요. 속삭이는 말에 토니가 대답했다. -그래. 그 소리를 듣고 그녀가 물결처럼 웃었다. -왜냐하면,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꼭 절망도 절규도 눈물도 모르는 것처럼 들렸다.

 

"약속했으니까요."

 

3.

 

그는 아주 오래된 시간들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가령, 이름이라던가, 가족이라던가. 눈 앞에서 반짝거리는 얇은 은테 안경을 치켜 올리는 의사를 바라보며 그는 그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말을 무어라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을 떠서 이름을 묻는 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으므로. 제 손에 붙어있는 수 많은 투명한 줄들과 제 옆에서 제 눈꺼풀을 열어젖히고 불빛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제 이름과 성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다는 그 기괴한 상실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병원의 흰 시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고는 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눈 앞에서 터졌던 흰 섬광과, 그리고.

 

"스티브?"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꼭 한숨 소리와 같았다. 그는 제 몸을 둘둘 감고 있었던 이불 더미 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가, 제 방문에 가만히 기대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햇빛이 많이 쏟아지는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인지 축축한 회색만이 떠돌 뿐이었다. 그는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데에서 오는 이유 모를 부끄러움과, 그 상대에게서 느끼는 기묘한 애정에 머뭇거리며 씩 웃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꼭 신음하듯 한 번 웃고는, 스위치를 눌러 방의 불을 켰다. 인위적인 형광등의 불빛이 그의 망막을 세차게 짓밟았다 다시 물러나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눈을 끔뻑거렸다. 다시 한 번 낮게 목을 울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그래도 너무 어두운 곳에 있으면 안되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냥 눈이 좀 부셔서....."

 

그는 손등으로 눈꺼풀 위를 마구 문지르고는 다시 깜박거리며 갑자기 환해진 세상에 적응하려 애썼다. 실금처럼 뜬 눈에 흐릿하게 실루엣이 잡혔다가, 곧 아물아물 형태를 갖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문틀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려고 하는지 드문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는 너무 깜박인 탓에 이제는 눈물까지 질금 배어 나오는 눈을 손등으로 한번 쓱 닦아내고는 순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가려는 겁니까? 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얼굴에는 그녀가 나갈 때면 으레 그렇듯, 어린애 혼자 집에 남겨두고 나갈 때 부모의 얼굴에 떠오르는 가벼운 긴장감이 묻어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는 그녀가 걱정해야 할 만큼 어리고 약하지 않은데. 그러나 그 긴장감 밑으로 얼음장 밑에서 헤엄치듯 잠겨있는 애정이 언뜻언뜻 보여, 그는 별 말 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고개를 가만 기울였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그녀가 꼭 우는 아이를 달래듯 급하게 중얼거렸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한 나흘? 닷새? 아무튼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약도 지난번에 챙겨뒀고, 혹시 모르니까 누가 찾아와도 문 열어주지 말아요. 그리고....."
"워, 워, 윤. 누가 들으면 정말 세 살배기 어린애 혼자 두고 가는 줄 알겠습니다."

 

-세 살배기 어린애면 차라리 놓고 가지나 못하죠. 그녀는 그렇게 쓰게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가만히 아래로 떨궜다. 가볍게 처진 어깨에서 느껴지는 피로와 난처함에 그는 새삼 그녀에게 있어 그가 얼마나 짐 덩어리와 같은지를 깨달았다. 기억을 잃은 이십 대의 남자라는 짐은 그녀 같은 작고 어린 아가씨에겐 시지프스의 바위덩이보다 더 묵직한 무게일 터였다. 꼭 담즙이 역류하듯 죄책감이 몰려와 그는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물었다. 물컹한 살덩이가 꼭 살점을 베어내는 느낌처럼 치아에 감겨왔다. 

 

".....스티브."
"정말로 괜찮습니다. 요즘엔 두통도 많이 줄어들었고...."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곧 차분하게 그가 주저앉아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바람과도 같아서, 발자국 소리조차 그림자에 묻어버리듯 정갈하고 고요했다. 그는 그녀가 아주 조심스레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것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 그녀는 거의 병적으로 그의 옆에 다가가지 않으려고 했다. 아직 그가 병원에 있었을 때, 잠깐 동안 옆에 앉았던 그녀를 보고 발작하며 심장이 반 쯤 멎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젠가 이 집을 찾아왔던 그녀의 손님 중 한 명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은 그녀의 잉크를 가득 엎지른 커피 색의 머리카락을 한 번만이라도 쥐어보고 싶은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그는 그가 잊어버린 그 오랜 옛적의 시간들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의문점을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를 모름에도 그 물음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고 심장에 흉을 지울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언제나 고통과 애정과 슬픔의 뒤섞임으로 일렁거렸다. 마치 잃어버린 새끼를 보는 어미처럼, 그게 아니면 죽은 애인의 시체를 보는 공주처럼. 그는 그런 그녀의 눈에서 아주 희미한 회색 조각들을 찾아 헤매다 제 뇌리를 칼로 쑤시는 두통에 머리를 싸 쥐고 주저앉아버리고는 했다. 그 모든 과거의 일들은 그에게 있어서 고통과 동일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며 제 머리통을 뒤집어 엎을 의문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녀는 누구일까? 왜 나와 함께 있어줄까? 과거의 나를 알까? 또다시 제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들을 알약 삼키듯 목울대 너머로 넘긴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덮었다. -윤. 혀 끝에서 느껴지는 이름이 꿀처럼 달았다.

 

"언제나 당신에겐 고마울 뿐입니다."

 

주저하며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쓸자 그녀가 주춤, 어깨를 움츠렸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심하고 비웃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나 아주 오랜만에 잡은 듯한 그녀의 손은 봄눈처럼 부드러웠고 눈물처럼 서늘했다. 꼭 아주 오래 전에, 이렇게 둘이서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에 찍은 사진들처럼 빛이 바래고 그러나 아주 아름다웠던 순간에.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관자놀이를 내리찍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침대 너머에 놓인 창문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마치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덧씌우기라도 할 듯 가만히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훑었다. 꼭 빗방울 같이 물기 어린 시선이었다. 그는 그 시선을 마주보며 입술 끝을 한껏 당겨 올렸다.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당신이 나를 걱정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꼭 울 것 같이 떨리는 시선이었다. 그는 반대쪽에 놓였던 손으로도 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는 그녀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의문으로 그녀가 상처입지 않기를. 그렇기에 그는 아주 조용히, 마치 순종적인 양처럼, 그의 의문을 입 안으로 되씹고 부스러뜨려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그의 침묵이 그녀를 슬픔에게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두 개의 손 안에 감싸여진 작은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애써 빙긋 웃으며 -그렇죠? 하고 말을 붙였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의 눈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늘게 웃었다. -그, 렇네요. 숨을 삼키는지 도막도막 끊긴 목소리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4.

 

돌아가야 해.

 

뱃속에서 용암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와글와글 끓어오른 쇳물을 억지로 내뱉는 것처럼 목줄기가 따끔거렸다. 저 멀리서 잿가루를 가득 담은 바람과 바튼의 둔탁한 고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어라고 하는 것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 속에 머리를 처박은 것처럼 온 세상이 먹먹했다. 무겁게 들어올린 시선으로 맑은 하늘을 세로로 세 등분 한 검은 창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인식하는 순간 하복부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에서 더위에 늘어진 개처럼 헐떡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이 온통 잿빛과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에서 쇳덩어리를 핥는 듯 비리고 쓴 맛이 났다. 그녀는 온 몸을 바르작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한참 전부터 머릿속에선 단 한 문장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해. 집으로. 그 사람이, 스티브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그래, 나는.... 온 머릿속에서 그 문장만이 맴돌았다. 나는 돌아가야 해.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빌어먹을 몸뚱이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불타고 있었고 팔다리는 쇳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이 까매졌다, 파래졌다, 잿빛으로 물들었다, 바늘구멍 사진기처럼 뒤집혔다. 아, 하지만 돌아가야 해. 그것은 지고한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돌아가야지, 돌아갈 거야. 그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언제나 그녀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버렸던 남자가. 그러니까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서, 돌아가서 그 사람을.

 

아, 스티브. 당신은 지금 어떤 하늘을 보고 있을까? 나처럼 온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하늘을 보고 있진 않겠지. 당신이, 나를 기억하던 시간의 당신이 마지막으로 본 하늘도 이런 하늘일까? 힘 빠진 손으로 바닥과 허공의 사이를 허우적거리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본 하늘도 나처럼 뒤집히고 뭉그러져 있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눈 색깔처럼 푸른 색이었을까? 그녀는 그 비 오던 날, 어린 아이처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창문 밖을 내어다 보던 스티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푸른 시선이 꼭 빗물에 씻겨 내려간 것처럼 희미하고 아득해 그녀는 그대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고 싶었다. 부탁이야, 당신이 날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하지만 나를 두고 그렇게 멀리 가버릴 눈은 하지 말아.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끝이 휘어 올라왔다. 소리 내어 웃고 싶었지만 핏물이 목구멍 안에서 끓는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눅눅하게 쏟아졌다. 그녀는 꼭 벌레가 죽기 직전 꿈틀거리듯 몸을 바르작거렸다. 비참하고 끔찍한 꼴이었지만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는 그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저 돌아와준다면, 돌아만 와준다면.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나?

 

세상이 꼭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았다. 당신,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 당신은 나를 당신 발등 위에 올려놓고 왈츠를 추었었지. 세 박자의 춤곡이 무색하게 엇나갔던 박자와 서툰 발 놀림이 당신의 머릿속엔 남아 있을까? 내가 영영 돌아가지 않으면, 그 기억은 당신에게서 사라지게 되어버리는 걸까? 목구멍에서 울컥 비릿한 덩어리가 치밀어 그녀는 발작하듯 기침을 했다. 쌔근쌔근 숨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죽음의 소리, 영원한 어둠에서 울리는 소리. 돌아가야 해. 악을 쓰듯 머릿속을 적시는 목소리는 어쩌면 마지막을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돌아갈 수 없음을 아니까. 그 사람도 그랬을까? 쓰러지는 그 순간에 미안해했을까?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눈 안에 하늘만을 담았을까? 윤은 다시 한 번 어떻게든 윗몸을 일으켜보겠다고 뱃가죽에 힘을 주다가, 곧 산 채로 난도질 당하는 느낌에 나오지 않는 비명을 터뜨리며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고통에 차마 삼키지 못한 눈물이며 타액 때문에 뺨이 끈적거렸다. 수채화를 손가락 끝으로 뭉개버린 것처럼 세상이 온통 뒤섞였다.

 

하지만 돌아가야지,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약속도 약속이었지만, 그녀는 스티브를 다시 홀로 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사랑하던 이들도, 믿을 수 있었던 국가도, 의지했던 동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 과거까지. 그래, 나는 당신을 홀로 두고 싶지 않았어. 당신이 모른다고 해도 말이야. 왜냐하면 당신은 늘 외로웠고, 늘 희생에 앞장 섰고.... 그런 당신을 나까지 두고 가버리면, 그 누구도 당신을 끌어안아 줄 수 없으니까. 그걸 당신이 몰라도, 당신의 등은 언제나 홀로 겨울 바람을 맞아야 할 테니까. 나는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하니까. 움직이지 않는 손 끝을 까딱거리려 애 쓰며 그녀는 입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신이 기다리니까. 그래, 그는 그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을 하곤. 비밀 이야기를 해줄까요, 스티브? 나는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때마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지. 하지만 말이에요, 그런 주제에, 당신이 그렇게 말간 얼굴로, 아무 것도 짊어지고 상처 받지 않아도 되는 얼굴로 나를 볼 때마다, 그 때마다 나는────

 

아주 멀리서, 누군가 급하게, 윤!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정말로 부른 것이었나? 어쩌면 환상일지도 몰라. 눈물 젖은 뺨이 딱딱하게 굳어가 그녀는 비죽, 비죽 애써 입 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돌아갈 거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그 방 안에서 나를 기다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당신에게. 어쩌면 당신은 영원히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기억을 찾고 나서 내게 질려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내 사랑, 스티브,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돌아갈 거야. 당신이 외롭지 않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당신이 외롭지 않게, 그리고 당신이 그 어떤 것도 짊어지지 않을 수 있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꼭.

 

아, 하지만 다행이야.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날 잊은 당신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게.

 

5.

 

윤이 죽었다.

 

그는 마치 청첩장이라도 되듯 정성스럽게 배달되어온 전사 통지서를 받아 들고, 아주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 채 눈만 끔벅거리며 긴 머리채를 축 늘어뜨린 어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어? 누가? 윤이? 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과 경험-그래 봐야 알량할 정도로 적긴 했지만-을 뒤집어 엎어가며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이유들을 찾아 헤맸다. 그녀는 아주 건강했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도 없었고, 그리고, 그리고....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제 손에 쥐인 전사 통지서에 멍청하게 시선을 주었다. 아, 그래, 언제 전사 통지서가 죽을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날아오던가? 누군가가 관자놀이를 칼로 조각 내듯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통과 갑자기 물 밀려오듯 치밀어 오른 깨달음에 그는 저도 모르게 한참을 눈 밑이 붓도록 우는 계집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꼭 아주 먼 바닷속에 자기도 모르는 새 떨어져버린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창살로 변해서 그를 난도질 하는 것 같았다. 죽음이 이렇게나 가까운 단어였나? 그녀가 이렇게나 죽음과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이었나? 그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있을 가슴팍을 손으로 쥐어 뜯었다. 꼭 불덩이가, 불덩이가 내장을 태우는 듯 목구멍 안 쪽으로 뜨겁고 역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정말로 그는, 단 한번도 그녀가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아주 먼 미래에도 그녀가 그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신은 언제나 가장 귀한 이들을 먼저 데려갈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저도 모르게 뺨이 축축해져, 그는 멀거니 제 앞에 선 어린 계집애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는 그 어리고 작은 여자 아이가 사실은 모조리 거짓말이라고, 그녀는 살아있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제발, 부탁이니까. 그러나 그의 그 생각을 죽어도 모를, 긴 머리를 늘어뜨린 어린 소녀는 그런 그를 내려다 보다 자기가 죽을 것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미안, 이라던가, 잘못, 이라던가. 탁하고 가는 훌쩍거림 사이로 들려오는 단어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제 뺨 위로 줄줄이 쏟아지는 눈물을 저도 모르게 더듬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 없어요. 단호하게 내뱉었어야 했던 말들이 입 안에서만 와글거렸다.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다녀오겠다고. 온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바스락거리며 우그러든 종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깊게 몸을 숙였다. 코 끝으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다녀오겠다고...... 

 

나는 떠나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봐야 했을까? 왜 내가 당신의 죽음 앞에 이토록 고통 받고 외로워하고 눈물이 나는지를? 그는 먹먹하게 잠긴 목을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 마지막의 순간에 당신이 상처 입을 것을 모른 척 하고 진실을 갈구했어야 했나? 당신의 눈물을 보는 것을 감수하고 당신에게 진실을 물었어야 했나? 하지만 대답해줄 당신은 이제 돌아오지 않겠지. 그 순간 둑을 터트리는 듯 쏟아지는 외로움과 머리통을 부숴놓을 듯 짓밟는 통증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6.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이었다. 아주 오래 전, 그녀를 만나기 전 있었던 곳. 그 때와는 달리 간소하게 늘어진 링거 줄을 그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이 곳이었다. 마치 아픈 자식의 머리를 쓸어주듯 제 옆에 앉아 있던 작고 마르고 슬퍼 보이던 여자. 당신은 누구냐는 말에 슬프게 웃던. 그는 다시금 관자놀이를 꽉 물어오는 통증에 입술을 자근자근 짓씹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장례식은 끝났을까? 그녀의 가족은 왔을까. 그는 그녀의 가족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에 대한 말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언제 그녀가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준 적이 있었나?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마치 성처럼, 혹은 견고한 방패처럼, 그의 고통을 불러올만한 모든 이야기들을 제 몸으로 막아 그의 터럭 하나에도 닿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녀의 보호 아래서 살아온 스티브 로저스는? 진실이 무언지 제가 뭘 알아야 하는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한 남자는? 그는 그녀의 이름과 성별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왜 진작 묻지 않았던가? 왜 단 한번이라도 그녀가 제 옆에 있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지? 왜? 왜 나는? 

 

"거, 엄청 혼란스러운 표정이군. 안 그래, 반짝 별 사나이?"
".....반짝, 별....?"

 

-그래, 반짝반짝. 계획적인 반짝 별 사나이. 그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쾌활함을 애써 흉내 내는 비통함을 담고 있음과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퍽 익숙함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으레 그랬듯 기묘한 익숙함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몰고 오는 찌르는 듯한 두통이 그의 관자놀이에 다시금 칼을 박았다. -적어도 지난번 만남보단 나아졌군. 지난번엔 날 보자마자 거품을 물더니 말이야. 비웃는 듯 느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어둑신한 병실 안으로 구둣발 소리가 또박또박 울려 퍼졌다. 그는 구두 소리가 제 침대 옆에 얌전하게 멈추어 설 때가 되어서야 그 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아니, 꼭 아주 오랫동안 봐 온 것처럼 친숙한데도 어딘지 한 군데가 섬뜩하게 낯 선, 그런 남자였다. 마치 갈가마귀의 날개처럼 윤기가 자르르한 검은 양복과 대조되도록 광택 하나 없는 검은 넥타이를 맨 남자는 조금 자그마한 체구였고, 마치 석유 속에서 손만 담갔다 뺀 것처럼 기름 냄새가 유난한 손으로 병실의 스탠드를 켰다. 깜박거리며 켜진 스탠드의 불빛에 남자의 선글라스가 반질거리며 그의 얼굴을 비췄다.

 

"오랜만이지? 오, 아니, 이렇게 말해야지. '우리 초면이지?'"
"당신....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대체...."
"윤의..... 친구."

 

남자는 '친구'라는 단어를 발음하면서 부끄러움과 서러움과 눈물이 뒤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윤의 주변 인물'의 등장에 긴장하며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뺨을 때릴까? 멱살을 잡고 울부짖을까? 그는 차라리 남자가 그보다 더 심하게 그를 질책하고 화를 내고 두들겨 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통각과 모욕은 고통을 잊기에 가장 좋은 마취약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되려 꼭, 그가 상처받은 동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상체를 가만히 숙였다가, 곧장 다시 허리를 빳빳하게 곧추세우는 것을 반복했다. 그는 그 행동 속에서 선글라스 너머로 조금씩 보이는 녹갈색의 눈동자가 남자가 풍기고 있는 그 기묘한 익숙함의 근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되어 희미하게 변색된 기억들. 남자는 한동안 그렇게 그를 향해 살그머니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멀어지는 행동을 반복하고는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급하게 찾아내려고 하지 마. 무뚝뚝한 상냥함이 그득한 목소리였다.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주제에 웃기는 소리지만..... 너무 빨리 찾아내려고 안달복달하지 마. 어차피 모조리 다 기억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기억체제 손상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고."

 

-잘못하다간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될 거야. 그는 제 이마에 마디 굵고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가 잊어버린, 그리고 그가 더 일찍 찾아야 했던 그의 기억들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원숙한 남성의 주름진 이마와 거친 뺨에 시름과 비통이 가득 잠겨 있어 그는 저도 모르게 장례식은, 하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장례식, 그가 갈 수 없었던 그 곳. 그녀는 꽃관에서 잠들어 있었습니까?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웃고 있었나요? 당신은 그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내게도 가르쳐주세요. 수도 없는 의문과 애원이 혀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는 꼭 돌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힘겹게 모든 것들을 삼켜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기를 원했지만 세상과 그의 두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 관자놀이를 한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천천히 둔해진 혀 끝을 놀렸다. -그녀의. 선글라스 너머의 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장례식은, 치뤄, 졌습니까?"
".....오."

 

남자는 감탄사와 신음의 중간 쯤 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조촐한 장례식이었어. 그녀의 부모님과 동생과.... 그리고 나 같은 그녀의 친구들 몇 명. 참가자들의 수를 영혼 없이 읊으며 남자는 고개를 약간 틀어 그의 어깨 너머 아득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더듬어 올라가며 남자가 말한 그녀의 장례식을 상상하려 애썼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은 고작해야 관 안에 뉘인 그녀일 뿐이기에. 그는 그녀의 몸뚱이보다 큰 관 안에 뉘인 채 눈을 감고 있을 창백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혈색도 온기도 숨결도 없이 인형처럼 누워있을 작고 어린 동양인 여자. 그녀는 이 나라에 묻힐까? 그녀의 나라로 몸뚱어리만 돌아가게 될까. 마르지도 못하고 다시 눈가가 시큰거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검게 가려진 세상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그 애의 유언장 1순위는 당신이야. 당신이 살던 그 집, 그리고 윤의 통장에 있던 대부분의 재산은 당신에게 귀속될 거고.... 물론 애통하게도, 그 애는 당신의 생각 따윈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며, 남자가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만약 그녀가 단 한번이라도 그에게 그런 사실에 대해서 말했더라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 그것들을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 테고. -다녀올게요,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 쳤다. 그리고 그 말간 목소리를 헤치고, 남자가 말을 덧붙여 왔다.

 

"그리고 당신에게 남기는 유산이 하나 더 있어."

 

-이건 그 애가 당신에게 넘기고자 했던 건 아니야. 남자는 그렇게 덧붙였다. -나와 그 애의 친구들... 그러니까 우리들의 독자적인 판단이지. 만약 그 애가 살아서 이걸 봤다면, 당신을 죽일 생각이냐고 멱살부터 휘어잡았을 걸. 소금기가 묻어 쓸쓸한 그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얼굴을 감쌌던 손을 떼어내 굽혔던 상체를 세웠다. 남자는 언제 선글라스를 벗었는지 이미 맨 얼굴이었다. 담담한 듯 보이지만 떨리는 녹갈색 눈동자, 시름과 비통으로 푹 들어간 뺨, 그리고 그를 향해 미약한 원망과 가득한 죄책감을 담은 눈빛을 한 남자는 그를 향해 CD 한 장을 내밀었다. 은색으로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그 가벼운 원반 하나가 천근처럼 무거워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녹갈색 시선이 그의 눈동자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퇴원 수속 해놓을게. 남자가 울음기로 척척하게 젖은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로 들이닥친 찬 바람이 목소리와 함께 뺨을 스쳤다.

 

"집에선 아무리 울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테니까."

 

7.

 

-다녀왔어요. 그녀는 언제나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꼭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입술과 떨리는 눈동자를 가지고 집 안을 날쌔게 훑고 그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를 보며 그는 왜인지 모르게 끝도 없이 서러워지고는 했다. 당신은 왜 언제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요? 내 얼굴은 당신에게 울 이유를 주는 것 밖에는 되지 않나요?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 의문들을 목구멍 안 쪽으로 우겨 넣고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 선명하게 웃기만 했지. 제 의문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을 매달게 할 것이라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다녀, 왔, 습니다."

 

불이 꺼진 집 안은 온통 냉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목 안에서 턱턱 걸리는 중얼거림을 애써 입 밖으로 씹어 뱉으며 천천히 대문을 닫았다. 그녀가 뱉은 다녀왔어요, 는, 그의 입 밖으로 떨어지는 것과는 다른 색채의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아늑하고. 그녀의 단 숨과 함께 떨어지는 그 목소리들로 세상 온갖 장소들이 밝아지는 것 같은 그런 달큼한 울림을. 그는 꼭 어머니의 행동을 따라 하려는 아이처럼 허덕거리며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그녀가 어디선가 나타나 슬며시 웃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내뱉은 말들은 단지 먼지 구덩이를 구를 뿐이었고, 그녀의 인사처럼 달큼하게 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은근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눈가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 버린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그의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아무리 다녀왔다고 인사를 해도. 그는 더듬거리며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까맣던 세상이 희미하게 빛 바랜 상아빛으로 물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유난스레 비틀거렸다. 추운 걸까? 그는 온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애써 문질러가며 걸음을 떼어 안으로,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의 방이 이 집에서 가장 햇빛을 많이, 오래 받는 곳인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어둡고 추운 곳이었다. 부엌에서도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아주 작고 조그마한 골방. 문턱조차도 그에 알맞게 가늘고 좁아 그는 마치 무덤 속을 기어가듯 엉거주춤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로 여느 여왕의 무덤에 함부로 방문한 도굴꾼의 심정으로 그는 그 안을 무자비하게 파헤쳤다. 꼭 닫힌 흰색 나무문 안에는 젊은 여성의 방이라고 하기엔 차라리 사무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차고 무미건조한 가구들만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아주 가끔씩만 풍겨오던 그녀의 설탕을 듬뿍 넣은 바닐라 크림 향기가 그의 얼굴로 쏟아져 그는 꼭 그녀의 품에 안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가 그녀를 안았나? 언제 그가 그녀와 그토록 가까이 있었던가? 그의 바로 옆에 앉는 것조차 저어하며 피하던 그녀였는데. 관자놀이가 또 다시 지근지근 아파오기 시작했다. 인두로 짓누르는 듯 뭉근하고 끔찍하게 아파오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과감하게 모른 척 하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 애의 비밀번호는 0704야. 병원에서부터 집까지 그를 실어 나른 남자는 그렇게 말해주며 입으로만 낄낄 웃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당신 생일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주 쓸쓸한 표정을 한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는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눈 앞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한 채 뒤이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어.

 

비밀번호는 사실이었다. 그는 눈물이 날 것처럼 파랗고 텅 빈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노트북의 옆 면을 이리저리 눌렀다. 남자는 그가 단 한번도 TV나 인터넷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을 입 속으로 내뱉긴 했지만 말이다. -노트북 옆을 잘 눌러봐. 남자는 무심한 듯 다정한 듯 알쏭달쏭한 목소리로 가르쳐 주었다. -그럼 뭔가가 튀어나오겠지. 옆에서 튀어나온 무언가는 꼭 오븐과 비슷한 것 같아 그는 조심스럽게 남자가 건네 준 CD를 위에 얹어 놓고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언가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하나? 하지만 남자는 그 이후의 말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손수건을 준비해놓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차마 어디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불편하게 주저앉아 푸르게 빛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나올까?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녀의 이야기를 하게 될까?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초침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꼭 단두대가 내려올 때의 소리 같았다. 

 

-어, 이거 켜진 건가.
"....윤?"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주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었다. -저기, 토니, 이거 진짜 켜졌어요? 그는 점멸하듯 까맣게 물들어 있는 화면에 가만히 시선을 주었다. 맑고 가벼운 목소리였다. 그가 지금껏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온 그 모든 시간들을 통틀어도 이 목소리만큼 가볍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을 찾을 수 없었다. 갉작갉작 칼로 후벼 파듯 아득하게 아파오는 머릿속 너머로 예의 그 남자의 목소리가 -여기 불 켜져 있는 거 안 보여? 하고 짜증과 웃음을 범벅으로 한 채 쏟아져 내렸다. 까르르 맑은 목소리가 -헉, 진짜네! 하고 환하게 웃어댔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종소리 울리듯 한껏 맑은 목소리였다. 그는 결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까맣게 내려앉았던 화면이 다시 확 밝아지며 붉고 구불구불한 머리를 단발로 자른 여자가 화면을 향해 빙긋 웃었다. -윤, 그건 뭐야? 하는 목소리에 장난기와 온기가 함께 녹아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요, 이번엔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려구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까르르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왜? 캡틴이 또 뭐 잘못했어?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은. 그래도 그 인간은 워낙.... 알잖아요?
-그래서 아예 동영상으로 찍어버리려고?

 

너도 참 대단하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그렇게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화면 너머에서 -그래요? 하고 그녀가 웃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화면을 쓸었다. 꼭 손만 내밀면 화면 너머의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때의 당신을 웃게 한 건 뭐였지? 나를 만나기 전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나는 정말 내 생각 그대로 당신에게 오롯한 슬픔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나? 머릿속 고통이 북을 울리듯 더욱 심해져 그는 이를 악 다물었다. 병실에서 남자는 이것이 유품이라고 말했다. 상속된 어떤 것, 그러나 그녀가 주고 싶지 않았던. 상냥한 그녀는 그가 그 옛적 한껏 웃을 수 있었던 시절의 그녀를 보면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라도 한 것일까? 그는 가만히 입술을 달싹여 소리 없는 의문을 세상으로 내던졌다. -그 옛적 당신을 웃게 한 건 누구였나요? 그러나 이제 상처를 받을 수도 대답을 할 수도 없는 화면 너머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붉은 머리의 여자가 가리킨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면이 가볍게 흔들리고 떨리는 숨소리가 색색거렸다. 달리고 있는 걸까? 그녀를 웃게 하는, 그 붉은 머리의 여자가 말했던 사람에게로? 화면 너머로 꺾이는 모퉁이가 보였다. 화면 너머에서 잔뜩 웃음을 삼키고 그녀가 외쳤다.

 

-스티브!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윤? 아까 전까지 토니랑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카메라는 또 뭐고?
-토니랑은 벌써 얘기 끝났어요. 당신 이제 죽었어요, 빼도 박도 못할 테니까.
-하하, 그거 무서운데.

 

모니터 안의 남자가 다정하게 웃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금발, 푸른 눈.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니터 안의 남자는 그저 그를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자체'였다. 마치 거울 안의 자기 자신이 홀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기괴한 섬뜩함이 관자놀이를 누르던 고통마저 모조리 몰아냈다. 목소리부터 얼굴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그와 다른 점 하나 없는 '스티브 로저스'가 화면 너머의 그녀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띄고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며 그는 혼란스러움으로 손을 떨었다. 어떻게? 왜? 내가 그녀와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저토록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녀가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격랑이 치미는 파도에서 혼자 내던져진 느낌에 그는 모니터를 뜯어내기라도 할 듯 움켜쥐었다. 나는 그녀의 슬픔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제 모니터 속의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그렇게 서슬이 퍼렇게 등장을 하고.....
-당신한테 제대로 못박아 두려구요. 뭐,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은 워낙 바보니까.
-....당신 나한테 요즘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모니터 안의 그가 입술을 죽 잡아 빼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낯선 표정이었다. 나는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그는 허망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모니터 속의 그와 윤은 아주 친밀한 사이 같았다. 아니, 단지 친밀한 것이 아니라. 그는 높다란 비명소리 같은 무언가가 머릿속을 휘젓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귓전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낯선 단어들을 속삭였다. -날 두고 죽어버릴 생각은 그만 둬요. 그녀가 이런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었나? 장난기가 물방울처럼 스며든 따뜻한 목소리.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당신의 묘비를 보고 싶진 않으니까, 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운 말투, 익숙한 어조. 그래, 그는 언제나 그녀의 그런 말투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냥함 위로 퉁명스러움을 덮어내 오해를 부르는 말투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언제? 삐이익, 하고,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집혔다. 시야가 아물아물 녹아내리다 다시 튀어 올랐다. 모니터 안에서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삐졌어요, 브루클린 베이비? 눈 밑이 뻑뻑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난 거짓말은 못해요, 알잖아요?
-이럴 땐 달래주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지.
-난 선의의 거짓말도 제법 못 견뎌서요. 아무튼.

 

마치 머리 안에 누군가 사이렌을 박아둔 것 같아 그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회색, 검정, 빨강, 파랑, 갈색..... 세상이 뒤집혔다 졸아들었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왜 모든 기억에는 이토록 고통이 따르는가? 왜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에게 고통으로 쏟아지는가? 그는 언젠가 그녀의 책꽂이에서 보았던 몇 개의 구절들을 떠올려보았다. 기억을 잃은 이들에게 잃어버린 기억들이란 죽을 만큼 없어지길 바라거나 그게 아니면 너무나 아름다워 차마 꺼내지 못한 것들이라던. 그렇다면 그에게 그녀에 대한,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은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저 과거에서조차 그는 그녀에게 슬픔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잊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녀도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는 저도 모르게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스티브. 혹시 당신이,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다면요.

 

말간 목소리가 어두운 허공을 갈랐다. 고통조차 그 목소리에 잘려나간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니터 안의 그는 마치 지금의 그처럼 망연하고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다면. 눈시울 안쪽으로 찰랑찰랑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머릿속에 천진하면서도 굳건하게 미소 짓고 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하게 휘어 내려간 눈매, 호선으로 접혀 올라간 입술과 보드랍게 떨어지던 얼굴선. 

 

아, 윤, 내 사랑, 그 때 당신의 미소처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었지. 턱 끝으로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감히 그 무엇이 당신의 그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웠겠어? 당신은 그만치나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모니터 너머로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찾아서, 내 옆에 붙잡아 둘게요. 
-내가 당신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된다고 해도?
-당신이 나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를 영원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었다. -약속이에요, 하고 손가락을 내밀었지. 눈 앞으로 그 날, 그 어벤져스 타워의 복도와 말갛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물 찬 장미처럼 생생한 색으로 살아났다. 내 사랑, 내 연인. 그는 허망한 눈으로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왜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던가? 왜 단 한번이라도 그녀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나? 아프지 않기를 바라서?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서? 그래, 기억을 잃은 연인을 생 눈으로 지켜보는 여자는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라도 한단 말인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죽음보다도 무거웠다. 왜 나는 당신을 이토록 오래, 이제 당신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이 때까지 잊고 있었을까. 당신은 그 오랜 시간을 홀로 기다렸는데, 약속을 지켜주겠다고, 기다렸는데. 우르릉거리며 창문 밖에서 하늘이 울부짖었다. 회색 빛으로 잔뜩 물든 집 안에서 그는 비틀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아직도 켜진 노트북에서 그 옛적의 그가 웃는 소리와 그녀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린 행복했었지. 당신이 있었고, 내가 있었고, 우리의 미래도 아직 남아있었는데. 대문을 열자 저 멀리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날도 비가 내렸었다. 그 때 그가 그녀에게, 왜 그와 함께 있어주느냐 물었다면 그녀는 아직도 그의 곁에 있었을까? 맨 발에 닿는 젖은 땅이 따끔거렸다. -말해줘. 그가 속삭였다. -말해줘, 내 사랑.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 빗물이 얼굴을 사납게 때리고 지나갔다. 아,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나는 이미 당신을 잃었지 않나. 입 안에서 단 한 음절로 이루어진 이름이 튀어나왔다. 절박하게, 애원하듯이.

 

"-윤."

 

윤, 윤, 윤, 유운────. 그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았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어떻게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지. 그가 말한다 한들 그녀에게 전혀 닿을 수 없을 테니까. 이제 그는 결코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길을 잃으면 내가 찾으러 나서야 하는데, 당신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영원히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지. 나는 당신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을 거야. 그는 머리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눈물이 빗물에 섞여 뺨으로, 눈으로, 땅으로 흘러내렸다. 어, 어어, 어어어, 하고 형태도 갖추지 못한 울음을 쏟아내며 그는, 멍청한 스티브 로저스는 울부짖었다. 당신이 없는데, 당신을 잡아야 하는데, 이젠 당신은, 당신은...... 차가운 빗물을 걷어내듯 상냥한 목소리가 속살거려 스티브 로저스는 통곡했다.

 

-약속이에요.

 

8.

 

-그러니까 내게 꼭 돌아와줘야 해요.

 

윤은 그렇게 말하며 새끼 손가락을 세워 스티브에게 들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조심스레 제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에 얽었다. -응, 약속하겠네.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 사이로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웃음기를 띠었다. 마주 댄 살갗에서 온기가 피었다. 

 

-꼭 당신에게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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